오늘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사실 이 책은 예이츠의 시를 읽으려고 샀는데, 막상 사보니 앞 3명의 시가 훨씬 많아 살짝 당황했다. 책에 실린 건 몇 개 안되긴 하지만, 예이츠의 시는 대체적으로 우울한 정서가 묻어나는 편이라고 느꼈다.
1.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잎은 많아도 뿌리는 하나
내 청춘의 모든 거짓된 시간 동안
햇빛 속에서 나는 잎과 꽃을 흔들었지만
이제 나는 진실 속으로 시들어가리.
이 시는 읽을 때, 제목과 시 자체의 느낌을 연결짓기가 어려웠다. 나이가 들면 지혜가 오게 될까?
일단 시만 놓고 보자면, 성경의 전도서가 떠올랐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고 영혼의 번뇌였도다.
내가 지혜를 알고자,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다.
나는 이것 또한 영혼의 번뇌임을 알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슬픔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슬픔을 더한다.
-전도서 1장 14, 17,18절 (King James Version)
전도서는 내용이 온통 헛되다 헛되도다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먼저 보는가? 상대가 입은 옷, 사는 집, 학력, 직업 같은 것들을 먼저 물어본다. 우리는 햇빛 속에서 팔다리를 흔들며,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름표와 소유물은 세상살이에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붙은 잎인 이름표를 떼어내면, 뭐가 남는가? '나', 뿌리인 나 자신이 남을 뿐이다. 죽을 땐 손에 붙잡고 가는 것은 없고, 경험에 대한 기억과 감정 정도는 남으려나.
이모할머니를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이 있다. 아흔 다 되어가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 감았다 떴더니 90이네.'
당신에게 묻는 노래가 있다.
어릴 때 읽었던 설화가 하나 생각났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의 꿈'.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신라 때 '조신'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지방 태수의 딸을 보고 반해 몹시 사랑했다. 그러나 그 낭자는 다른 사람과 혼약이 맺어졌다는 소문이 들렸고, 조신은 관세음보살상 앞에 가서 자신이 빌었음에도 그 여인과 맺어지지 않았음을 원망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인이 찾아와, 사실 당신(조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둘은 그대로 도망쳐 나와 살림을 차렸는데, 찢어지게 가난해 결국 큰 아이는 굶어죽고 말았다. 구걸로 먹고 살다가, 각자 아이 둘씩 데리고 헤어지기로 한다. 헤어지려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깬다. 새벽빛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은 이미 허옇게 세었고, 세상 만사에 뜻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꿈속에서 죽었던 큰 아이를 묻은 자리를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다. 그것을 씻어 절에 봉안하였고, 그 뒤 조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삼국유사 제3권[탑상], 조신의 꿈
2. 그대 늙었을 때
그대 늙어 백발이 되고 잠이 많아져
난로 가에서 고개를 꾸벅거릴 때,
로 가에서 고개를 꾸벅거릴 때,
난로 가에서 고개를 꾸벅거릴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그대의 눈이 오래전 지녔던
부드러운 시선과 그 깊은 그림자를 꿈꾸어라
많은 사람이 그대의 우아한 순간을 사랑했고
진실이던 거짓이던 그대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대 안의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 변해가는 얼굴 속 슬픔을 사랑했었다.
...
앞서 소개한 시의 주제와 연결되면서도, 살짝은 다른 느낌이다.
아마 사람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자주 있진 않을 것이다. 다들 바쁘니까. 하지만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게 될 때가 있다.
어린 아이의 눈은 대개 호기심으로 반짝거린다. 학생들의 눈은 약간의 피로와 지겨움이 담겨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어른이어도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 많지만, 생기를 살짝 잃은 듯한 눈도 있다.
부드러운 시선과 깊은 그림자.
사람들 모두 사랑을 갖고 있다. 동시에, 깊은 내면에는 자신만의 아픔이 있다. 대부분은 그 깊이까지 들여다 볼 여유와 힘이 없는 듯하다. 나는 아픔을 표출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표출한다고 해서 아픔이 바닥나는 것은 아니며, 그 상흔을 어떻게 보살필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예전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들만 사랑했다. 우아하고, 예쁘고, 내 마음에 드는 모습만을. 동시에 나도 그런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살 순 없더라. 애초에 되지도 않을 뿐더러 기력 소모도 심하다.
한 사람에게 붙여진 여러 사회적 이름표 외에도, 눈 너머 숨겨진 그 사람의 고결함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줄 그런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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