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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나의 인생은 아주 바쁘지 않아요

by Bellot 2024. 6. 3.

펴낸이:이원호, 리나북스, 2023.2.15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은, 어릴 때 타자연습 프로그램에서 처음 보았다. 타자검정에는 윤동주의 「별헤는 밤」이 있었는데, 거기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그 때는 누군지 전혀 몰랐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는 처음 읽었을 때 당장 심상이 떠오르진 않고, 두어 번 더 들여다보면 '아' 하고 느껴졌다. 문체가 직관적이기보다는 부드럽게 비유하는 느낌이다.

 


 

1. 인생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길을 걸어가는 어린아이가
바람에 실려오는 꽃잎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듯.

어린아이는 꽃잎을 주워 모아두려 하지 않아요.
머리카락에 꽃잎이 머무르고 싶다 하여도
어린아이는 가볍게 털어내지요.
그렇지만 어린아이는
새로운 꽃잎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어요.

 


 

인생을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인생은 각자가 겪는 바가 다르니, 인생에 대해 내리는 정의 또한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전쟁터로, 누군가는 축제의 장으로. 

 

우리집은 어린이집을 한 적이 있는데, 아직 말을 못하는 아기들이 말을 잘 하게 되는 것까지 보았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우리 어린이집을 굉장히 좋아했다. 어머니께서 아침에 데리고 오시면, 뒤도 안돌아보고 신발 벗고 들어온다. 장난감 갖고 놀기도 하고 선생님과 함께 놀이도 하고. 장난감이 싫증 나면 자연스레 다음을 찾는다. 그것이 어느 바구니, 어느 선반에서 왔는지는 굳이 기억하진 않는다.

 

놀다보면 엄마/아빠가 데리러 온다. 우리는 대부분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는데, OO아 엄마 오셨네~ 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이고 뭐고 당장 문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냉큼 팔을 뻗는다. (엄마!)

 


 

 

아이가 노는 것처럼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매일이 재밌는 놀이터이고, 즐겁더라도 한 순간에 미련 없이 놓을 수 있을까?  아이는 웃음과 울음을 순식간에 넘나들곤 하지만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다.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는 4년,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당신 안에는 아이의 순수함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나요?

 

 

 

 


 

 

2. 나의 인생은 아주 바쁘지 않아요

 

나의 인생은 아주 바쁘지 않아요.
내가 서두르고 있었나요?
나는 나의 배경 앞에 서 있는 나무. 
나는 나의 많은 입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닫는 입.

나는 두 음 사이에 침묵합니다.
죽음의 소리가 커지기를 원하는
서로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두운 간격에 두 음은
떨리며 화해합니다.
그리고 노래는 아름답게 유지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스시의 마법사(소설)에는, 이런 노래가 나온다.

말은 침묵 속에만
빛은 어둠 속에만
삶은 죽어감 속에만 있네.
텅 빈 하늘을 나는 매의 찬란함이여

- 어스시 전집 제 1권, 어스시의 마법사. p.294 「에아의 창조」

 

 

피아노 같은 악기를 다뤄보았다면, 악보를 읽을 줄 알 것이다. 이어지는 음표들 사이에는 다른 것도 있는데, '쉼표' 이다. 쉼표는 음표와 달리 음을 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쉬는 것이다. 

 

쉼표는 음표만큼 많이 등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쉼표가 있을 때 그것을 지키면, 지나간 음은 끊어지고 다음 음의 시작이 더 선명하게 들린다.

 

음표만 있는 악보를 계속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서둘러서 음표를 건너가다 쉼표를 만나면, 다음 음표를 만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어두운 간격에 두 음은 떨리며 화해합니다.

지금의 당신은요. 지난 순간, 다음 순간의 당신과 화해할 수 있나요?

 

그리고 노래는 아름답게 유지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침묵에 관한 시가 하나 더 있다.

한 번만 그렇게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우연한 것, 본의 아닌 것에
이웃의 웃음이 침묵한다면,
나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소음에
내가 감시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그러면 나는 천 배나 더 많이
당신의 전부를 생각합니다.
...

 

세상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소음으로 가득하고, 우리 머릿속은 쉬지 않는 재잘거림으로 가득하다. 

그 재잘거림이 그치는 순간이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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