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시 수업 글을 거의 못 썼다. 이번학기는 시험 준비, 공모 준비를 해서 여러모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난 학기만큼은 자주 가지 못해서 영 아쉬웠지만, 뒤늦게라도 합평 시를 기록해 봐야지.
1. 원작시
흔들다리
한 발만 내딛어도
발 밑이 요동칩니다
나의 걸음과 운율이 맞지 않아
발을 더 뻗어야 합니다
맞은편 단단함으로 내려서도
여전히 일렁임이 남은 듯
몸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두 다리를
멈춰 세웠을 때에야
알아차립니다
흔들림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2. 원작시의 배경
시 그대로, 정말 흔들 다리 건넌 직후에 썼다. 그날은 마침 작은 수첩과 연필을 들고나간 참이어서. 수첩 꺼내서 시를 휘갈겨 쓰고는, 나름 소재를 잘 잡아냈다고 생각했었지.
사람이 살면서 풍파를 맞으면, 다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힘든 상황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감정적인 충격은 오래가기 때문이지. 나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고, 이 시를 쓴 시점에서도 과거에 붙들려 있었다. 최근에 와서야 드디어 깨달았다. 과거가 날 붙들었던 게 아니라, 내가 붙잡고 있던 거였다.
지금 와서 보니.. 소재는 괜찮았지만 썩 잘 쓴 시는 아니었군. 1/3 정도는 잘라도 똑같겠다 싶은데, 교수님께서 내 시를 없애버리시진 않아서 다행이야...
3. 합평시
흔들다리
한 발만 내딛어도
계곡이 요동칩니다
걸음과 운율이 맞지 않아
발을 더 깊이 내디뎌야 합니다
다리를 건너고도
여전히 몸은 일렁임이 남은 듯
계속 나아가려고 합니다
억지로 잡아 세웠을 때에서야 알아차립니다,
이미 건너왔다는 것을
4. 합평시 뜯어보기
한 발만 내딛어도
발 밑이 요동칩니다
나의 걸음과 운율이 맞지 않아
발을 더 뻗어야 합니다
↓
한 발만 내딛어도
계곡이 요동칩니다
걸음과 운율이 맞지 않아
발을 더 깊이 내디뎌야 합니다
- 1, 2연
'발 밑'이 '계곡'이 되었다.
시 전체에서 '발', '다리'가 많이 나오는 데다, 흔들 다리는 보통 계곡 위에 있으니 계곡이라고 써도 되겠구나!
그리고 난... 지금까지 '내딛다'가 표준 형태인 줄 알았는데, '내디디다'가 표준어고 '내딛다'는 준말이었다.
네이버 사전에 국립국어원 답변이 있었다. '내딛어' 형태로는 활용 못하고 '내디뎌야'라고 써야 한다고, 처음 알았다.
우리말 배우기도 갈 길이 멀구만~ 난 평소에 국어사전을 자주 찾아보는 편이라 나름 한국어에는 자신 있었는데ㅠㅠ 교수님 앞에 무참히 깨졌다. KBS 우리말 겨루기 챙겨봐야 하려나.
나는 산문에서 하던 습관대로~ '나의', '너의', '당신의' - 요런 관형어를 많이 쓰는 편인데, 시에서는 그런 거 없어도 이해하는 데 지장 없으면 삭제하라고 하셨다. (아직 어디서 빼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편)
맞은편 단단함으로 내려서도
여전히 일렁임이 남은 듯
몸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
다리를 건너고도
여전히 몸은 일렁임이 남은 듯
계속 나아가려고 합니다
- 3연
다리를 다 건너도, 잔상처럼 흔들림이 몸에 남을 때가 있다. 러닝머신 뛰다가 갑자기 땅에 내려오면 이상한 것처럼.
우리 교수님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에둘러 쓰는 것보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하시는 편. 시에서 비유/은유를 쓰다 보면, 쓸모없는 포장지를 두른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부분은 고쳐주신다.
'계속 나아가려고 합니다' - 이 부분은 원래 4연의 첫 행이다. 하지만 원작시 3연 3행의 '몸은 착각을 일으킵니다'라는 의미와 같으므로, 둘 중 하나만 써주면 된다. 고로 4연의 첫 행은 3연 마지막 행으로 변신!
'몸은' - 요 단어는 2행으로 옮겨주셨다.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두 다리를
멈춰 세웠을 때에야
알아차립니다
흔들림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
억지로 잡아 세웠을 때에서야 알아차립니다,
이미 건너왔다는 것을
- 4연
계속해서 나아가려 한다 - 3연의 마지막 행을 삭제하고 이 부분을 3연으로 당겨 주셨다. 의미가 중복되는 행 없이 깔끔해졌다.
'때에야' / '때에서야' -
나는 '흔들림'을 '풍파'에 대입하며 [흔들림이 지나갔다] -라고 썼다. 하지만 흔들다리만 놓고 보자면, 사람이 다리를 건너간 것이니 '흔들림이 지나갔다' 보다는 '사람이 건넜다'라고 하는 표현이 더 들어맞는다. 교수님께서 고쳐주신 시를 보니 요런 게 잘 보인다.
수동형으로 쓰느냐, 능동형으로 쓰느냐는 글에서 아주 큰 차이를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학창 시절부터 영어를 많이 해석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번역체 특유의 수동/피동 표현에 익숙해져 있다.
영어는 사물이 어떤 역할을 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표현하는 데 관대하지만, 한국어는 움직이는 주체(특히 사람)에 동적인 의미를 더 많이 부여하는 편이다. (고등학교/대학교 다닐 때쯤 이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말이지...)
합평시 다시 뜯어보니까 재밌다. ㅎㅎ
이번 봄학기는 내 시가 어쩌면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던지... 겨울학기 때는 '나 나름 잘 쓰는 거 같아~'라고 생각했는데. 봄학기는 달리다가 엎어진 기분이었다. 꺾여야 할 교만이었는지, 나를 작게 여기는 습관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작년 가을-겨울학기는 일주일에 한 편 쓰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걸 그대로 수업에 냈다. 봄학기에는 4월 말을 제외하고는 시를 2배로 썼는데, 대부분은 메모장에 잠들었다.
이번 주엔 시 다섯 편을 혼자서 이리저리 고쳐봤는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밀린 합평시 쓰면서 조금씩 풀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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