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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 창작 수업

시 창작 수업 18 - 슬그머니

by Bellot 2025. 1. 24.

요번 수업은 합평에 못가고, 수정된 시만 받아보았다. 합평본에, 이번에도 잘 썼다구 칭찬해주셨다. 허헛^^


1. 원작시의 배경

나는 여행가서 전망대 있으면 무조건 올라갔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도시 풍경을 보고, 번화가나 백화점 둘러보기, 삐까번쩍한 그런 곳 좋아했다.
 
그리고 작년에 대만가서는 완전히 반대로 했다. 헬스장 가고, 등산하고, 공원 가서 다람쥐 보면서 만두 까먹고, 몽돌 바닷가에 부직포 깔고 파도 구경하고. 아주 편-안하더라. 요즘은 구름 보는 것도 재밌어서 시로 쓸 지경이니.
 
일찍 센터 도착한 날에, 교수님께서 '이제는 자연이 좋더라고요.'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앞에서 박수치면서 '엄머 저도 요즘 그래요.' 하고 싶었으나, 내가 수줍음이 넘 많아잉...
 
산 속에 얼마간 살아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싶을 때 쿠팡 같은 택배를 시켜보면 갑자기 아차 싶다. 900페이지 책을 시켜도 문 앞에 턱턱 갖다준다구~ - 요런 느낌을 시로 적어보았다.


2. 합평시 뜯어보기

길게 뻗은 도로 위 바삐 가는 자동차
줄 맞춰 쌓아 네모난 건물
주황색 빛무리를 향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길게 뻗은 도로 질주하는 자동차
줄 맞춰 쌓아 올린 네모난 건물
주황색 빛무리, 밤 풍경을 연신 찍어댔다
- 2연

[도로 위 바삐 가는 →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에 어울리는 동사형은, 확실히 '질주하다' 가 더 어울리네. '바삐 가다' 는 보통 사람 발걸음에 많이 쓰니까.
 
[쌓아둔 → 쌓아 올린]
아 그렇지, '건물을 올리다' 라는 말은 구어체에서도 많이 쓴다. 쌓아둔단 것은 '사람이 유무형의 것을 (손으로) 쌓아 놓다.' 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쌓아 올린'이 더 자연스럽네.
 
[밤 풍경]
전망대에 올라가더라도, 해가 떨어져야 주황색 빛무리가 보인다. 밤 풍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직설적으로 와닿네! '사진'은 없어도 '찍어댔다' 라는 동사를 보면 이미 알 수 있으니 삭제하신 듯하다. 항상 단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단어 하나, 글자 하나만 바꿔도 행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손 시린 계곡
절벽 바위가 만든 액자
바람이 빗어둔 결 좋은 나무 편안하다

이제는 손 시린 계곡
바위 절벽이 만든 액자
바람이 빗질한 나무가 편안하다
- 3연

우선 맨 앞에 '이제는' 있어서 '더' 는 없어도 된다. 이제 보면 알 수 있는데 매번 교수님이 고쳐주시기 전엔 모른단 말이지... 흑흑ㅠㅠ 
 
[절벽 바위 → 바위 절벽]
나는 절벽에서 바위가 군데군데 뚫려 있어, 그 사이가 액자가 되는 풍경을 떠올리며 적었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는 바위 절벽이 더 자연스럽게 들리겠군.
 
[빗어둔 결 좋은 나무 → 빗질한 나무]
아, 빗질했으면 이미 결 좋을거지 그렇지. 왜 나는 요런 부분이 안보였을까? 그래도 이젠 왜 수정되었는지 알 수 있으니, 이만큼 온 것만해도 어디야! (내가 생각한 이유가 맞아야 할텐데...)


지하의 페르세포네처럼
얼마간만 푸르름 속에서
깨끗한 코로 살 수는 없을까
생각을 펼치지만

지상과 지하를 오가던 페르세포네처럼
얼마간만이라도 푸르름을 숨 쉴 수는 없을까

깨끗한 숨을 그려보다가
- 4연

예전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작년 가을엔 감기 걸렸다가 수도꼭지 덜 잠근거 마냥 코를 흘렸다ㅠㅠ 어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면 코가 좀 멈추려나. 
 
그리고 내 염원인 깨끗한 코는, 푸르름을 숨 쉬는 깨끗한 숨이 되었다. 확실히 도시에서 쉴 법한 숨과 대비되면서도, 시적인 표현~ 푸르름을 숨쉬기! '푸르름 속'이라고 적지 않아도 눈 앞에 그려진다. 멋져~
 

페르세포네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전승이 있지만,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만화책을 기반으로 설명해보자면 :
1.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미인!) → 2. 지하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 → 3. 데메테르 여신 파업 (내 딸 돌려내기 전까지 대지 돌보기 중지!) → 4. 인간 : 배고파요ㅠㅠ → 5. 제우스가 나서서 중재 → 6. 하데스는 이틈에 페르세포네에게 석류 몇 알 먹이기 (지하 음식 먹으면 거기 살아야 함) → 7. 협상안 : 약 4개월 정도는 지하에서, 나머지 기간은 지상에서 보내기로 결정.
결론 : 사계절 (딸이 집에 오면 땅 돌보기^^ 딸 내려가면 시무룩...)

페르세포네처럼 강제로 왔다갔다 하겠다는 의미 아닙니다! 자연 속에 몇 달씩 왔다 갔다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으나,


집 앞에 놓아주는 무거운 책을 보면
슬그머니 접고 마는 것이다

눈 앞에 놓인 책을 보고는
슬그머니 접는다
- 5연→6연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을 택배로 받은 날, 자연 속에 살고 싶어~ 는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래서 제목을 '말짱'이라고 지었는데, 내가 봐도 웃겼다. 그래서 제출하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제목 짓기 어려워요...) 그리고 '슬그머니'로 바꿔주셨다ㅎㅎ
 
다만 이 마지막 연은 고민이 되네. 나는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표현하려고 '집 앞에 놓아주는 무거운 책'이라고 썼다. 그런데 '눈 앞에 놓인 책'이 되면 도시 생활의 편리함인지, 아니면 책읽기가 급한건지 의미가 모호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수정하신 데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령 의미가 명확히 와닿지 않는다거나 등의 이유가 있겠지. 이번 합평엔 참석을 못해서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원래의 의미는 유지하되 다르게 고쳐서 써봐야겠다.


슬그머니

그리고 수정 안하기로 했다. 

시를 다시 읽어보니 '일상' 보다는 '선호 여행지 변화'에 더 가깝고, 산 속이 좋긴 하지만 아예 속세를 등지고 떠나겠단 의미도 없으므로, 합평에서 수정된 마지막 연이 더 잘 어울리네. 해석의 여지도 좀 더 다양한 듯하고.

 

시를 쓰다보면 가끔은 시가 내 자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난 애없슈) 그래서 의미도 많이 담고 싶고, 내 본래 의도를 꼭 유지해서 전달하고 싶은 마음도 많이 든다. 하지만 그 마음을 살짝만 내려놓으면, 원래 형태가 꼭 최선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도 하지만, 고집에만큼은 시간이 대단한 역할을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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