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16:00 안현심의 시창작 아카데미
롯데문화센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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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갑자기 확 추워졌다.
저번주만 해도 외투를 잘 안 입었는데, 이번 수업때는 내복에 담 들은 바지 입고 장갑까지 끼고 갔다.
가을학기가 끝나가고 있나보다.
(원작시) 동생 집
서울 사는 동생에게 갔다
깨끗한 새 동네에 새 집
언니 온다고 줄 세워둔 화장품
하나 더 내놓은 베개가 나를 반긴다
혼자서도 잘 사는구나,
밤공기 맞으며 저녁 먹다가 나온 한 마디
너무 외로워
잘 정비된 도로, 우뚝 솟은 건물 사이에서
느껴졌던 쓸쓸함이 동생을 비껴가진 않았나보다
매일 뛰어들어가는 그림 속엔
내 가족은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
무덤덤한 적막만이 살짝 비껴설 뿐이다
언니가 있으니까
같이 저녁도 먹고 너무 든든해
홀로 설 순 있어도
혼자 살 순 없는 것이
사람인가보다
1. 원작시의 배경
서울에 일이 있어 동생 집에 갔다.
나보고 서울 와서 같이 살자는 말은 몇 번 했는데, 늘 흘려들었다.
왜냐면 우리 둘은 생활패턴이 전혀 다르다^^ (난 얼리버드, 동생은 올빼미)
아무튼 동생 집에 도착해 밖에 나가보니, 도심이 아닌지라 도로가 깨끗하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높은 건물들 사이로 바삐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동생은 부모님 뵈러 자주 내려가진 않는데, 혼자 사는 게 좋아서 그런가? 싶었다.
같이 저녁 먹으니까 좋다는 말에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합평시) 내 동생
서울 사는 동생에게 갔다
언니 온다고 줄 세워둔 화장품
하나 더 내놓은 베개가 나를 반긴다
밤공기 맞으며
저녁 먹다가 나온 한 마디,
너무 외로워
우뚝 솟은 건물 사이
웅크린 쓸쓸함이 동생을 품었는가
매일 뛰어드는 풍경 속 가족은 없다고,
집으로 돌아오면 적막이 반길 뿐
오늘은 언니가 있으니까
너무 든든해
2. 합평시 뜯어보기
서울 사는 동생에게 갔다
언니 온다고 줄 세워둔 화장품
하나 더 내놓은 베개가 나를 반긴다
- 1연
[깨끗한 새 동네에 새 집] 행이 삭제되었다. 없어도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 더 내놓은 베개]
이 부분이 재밌다고,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혼자서도 잘 사는구나,
밤공기 맞으며 저녁 먹다가 나온 한 마디
너무 외로워
↓
밤공기 맞으며
저녁 먹다가 나온 한 마디,
너무 외로워
- 2연
동생 집에 도착해보니, 언니 온다고 깔끔히 치워둔 게 보였다.
그래서 그 감상을 그대로 썼는데 여기서 걸렸다.
한 연 안에 내가 하는 말 [혼자서도 잘 사는구나], 동생이 하는 말 [너무 외로워] 이 동시에 있어서, 어떤 화자가 말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사실은 [혼자서도 잘 사는구나,] 뒤에 '싶었는데' 라는 단어를 처음엔 썼다.
그러다가 쉼표로 생략해버렸는데, 의미 파악이 어려워져 버렸다.
그대로 살려뒀으면 어떻게 수정하셨을까 싶네.
우선 살린다면 이렇게 되겠지.
혼자서도 잘 사는구나, 싶었는데
밤공기 맞으며 저녁 먹다가 나온 한 마디
너무 외로워
음, 확실히 행을 추가하니 반전의 효과는 두드러진다. 의미 파악에도 문제가 없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읽어보면 어떤 쪽이 나은지 알게 되겠지.
잘 정비된 도로, 우뚝 솟은 건물 사이에서
느껴졌던 쓸쓸함이 동생을 비껴가진 않았나보다
↓
우뚝 솟은 건물 사이
웅크린 쓸쓸함이 동생을 품었는가
- 3연
1. [잘 정비된 도로,]
이 부분은 나열에 가까워서 삭제.
2. [느껴졌던 쓸쓸함]
내 생각 그대로 쓴 구절이긴 한데, 나도 좀 심심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교수님께서 (웅크린) 이라는 단어로 바꿔주셨다.
우뚝 솟은 건물과 웅크린 쓸쓸함이 명확하게 대비된다.
3. [쓸쓸함이 동생을 품었는가]
사실 '쓸쓸함이 사람을 품는다.' - 요런 문장은 평서문에서는 거의 안 쓰는 형식이다.
하지만 요런 게 바로 시적 허용~ 익숙치 않은 주어와 서술어의 배치를 허용함으로써 살짝 낯선 효과를 준다.
매일 뛰어들어가는 그림 속엔
내 가족은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
무덤덤한 적막만이 살짝 비껴설 뿐이다
↓
매일 뛰어드는 풍경 속 가족은 없다고,
집으로 돌아오면 적막이 반길 뿐
- 4연
1. [내 가족은 없다]
우선 4연은 내가 동생을 보며 한 생각인데, 교수님께서 동생이 화자인 말이 되면 시의 흐름 상 깔끔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가족은 없다고,] 라고 수정해주셨다.
2. [적막]
적막이 비켜선다, 반긴다. 어느 게 나을까?
교수님은 '반긴다' - 가 훨씬 낫다고 하셨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면, 사람이 들어서면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적막이 비켜선다' 라고 표현했다.
'반긴다'가 더 낫나? 나는 잘 모르겠다.
이 한 단어만은 내 마음에 드는 수정이 아니었지만, 우선 그대로 받아들였다.
3. [적막만이]
시에서는 '~만' 이라는 조사는 잘 안쓴다고 하신다..! 처음 알았어
언니가 있으니까
같이 저녁도 먹고 너무 든든해
홀로 설 순 있어도
혼자 살 순 없는 것이
사람인가보다
↓
오늘은 언니가 있으니까
너무 든든해
- 5연
우선 원작시의 맨 마지막 연은 부연 설명에 가까운 부분인데, 교수님은 요런 부분은 거의 삭제하신다.
산문이 아닌 시에서는, 설명 문장이 맞지 않다고 하신다.
같이 저녁 먹는 것과 든든함은 단어 상으론 약간 차이가 있다.
물론 같이 저녁 먹는 것의 든든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간결함을 위해 든든함을 살리기로~
교수님이 수정해주시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다.
나도 다 아는 단어인데 머릿속에서 잘 안나온단 말이지.
특히 부사어 재배치를 정말 신기하게 하신다. 그걸로 행간을 줄이시는 걸 보면 경이로울 정도.
나도 산문에 익숙한지라 간결성을 살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늘 그걸 쏙쏙 집어주셔서 수업 날마다 감탄한다.
겨울학기 수업까지 좀 더 듣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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