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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 창작 수업

시 창작 수업 5 - 좋다

by Bellot 2024. 10. 13.

 

 

[화] 16:00 안현심의 시창작 아카데미

롯데문화센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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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절반이 지나갔다. 
무더위가 가시지 않았던 9월부터 갔는데, 어느새 저녁 나절에는 찬바람이 분다. 
하지만 아직 아침 햇살은 따뜻하다. 덥다..
 


(원본)  좋다

흠집 난 안경은
미끌거리는 콧등 위에도 잘 버텨서 좋고
고무줄 늘어난 바지는
밥을 많이 먹어도 자국이 없어 좋고
뒤축이 닳은 신발은
신데렐라 구두마냥 꼭 맞아 좋고
겉가죽 너덜거리는 가방은
등껍질처럼 찰싹 붙어서 좋고
느려진 전화기는
잠시 고민할 시간을 줘서 좋다
 
이제 그만 써. 
바꿀 때도 됐잖아?
 
아니,
질이 나서 딱 좋아.

 


 

1. 시를 쓴 배경

나는 마음에 드는 물건은 오래 쓴다. 안쓰는 물건은 미련없이 버리지만
 
안경은 10년째, 고무줄 늘어난 잠옷바지도 10년째.
운동화는 뒤꿈치 닿는 부분이 너덜거리면 바꾼다. 웬만한 운동화는 내 발에 잘 안 맞기 때문이다. 
 
가방걸이 부분 가죽이 떨어지는 가방(백팩)이 있다. 테이프로 칭칭 감았다. 주머니 많아서 좋단 말야...
휴대폰 6년째 쓰는 중. 잘 돌아가기도 하고, 애초에 휴대폰 기능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오래 쓰는 편이었다. 이제 그만 쓰고 바꾸라는 말, 수도 없이 들었다. 
난 그냥 익숙해서 편해지면 그게 좋은데. 
그 마음을 담아서 썼다. 
 
주제와 제목은 좋다고 칭찬을 받았으나, 맨 마지막 줄이 아쉽다고 하셨다.
시의 앞부분이 평이하기 때문에, 이 경우 마지막 문장이 여운을 남길 백미가 되어야 한다고. 
 
 


(합평본) 좋다

흠집 난 안경은
미끌거리는 콧등 위에서도 잘 버텨서 좋고,
고무줄이 늘어난 바지는
밥을 많이 먹어도 자국을 내지 않아 좋고,
뒤축이 닳은 신발은
구부려 신어도 눈 흘기지 않아 좋고,
겉가죽이 너덜거리는 가방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찰싹 들러붙어서 좋고,
느려진 전화기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서 좋다
 
이제, 바꿀 때도 됐잖아?
 
아니,
우리의 어깨동무는
더 질이 났는 걸.
 


 

2. 합평시를 살펴보자

흠집 난 안경은
미끌거리는 콧등 위에서도 잘 버텨서 좋고,
고무줄이 늘어난 바지는
밥을 많이 먹어도 자국을 내지 않아 좋고,

 

우선 1연 전체에 쉼표가 추가되었다. 1연 전체가 나열 형식이라, 읽을 때 아직 행이 많이 남았다는 압박이 약간 있었다.
낭송할 때 쉼표가 있으니 한 번씩 쉬어가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뒤축이 닳은 신발은
구부려 신어도 눈 흘기지 않아 좋고,
겉가죽이 너덜거리는 가방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찰싹 들러붙어서 좋고,
느려진 전화기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서 좋다

 

1. [신데렐라 구두]
[신데렐라 구두] 와 [뒤축이 닳았다]는 표현은 좀 맞지 않는 느낌이었나 보다.
발뒤꿈치와 신발의 안감이 닿는 부분을 '뒤축'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읽었을 때는 신발 자체의 뒤축을 연상하는 듯했다. 
 
그래서 '구부려 신어도 눈 흘기지 않아' 로 수정되었다.
 
2. [등껍질, 찰싹 붙어서]
'등껍질' 앞에는 '거북이'가 추가되었고, [찰싹 붙어서] 는 [찰싹 들러붙어서]로 수정되었다.
의미가 명확해지면서 좀 더 재밌는 상상(연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3. [고민할]
'고민'이  '생각'으로 바뀌었다. 고민은 살짝 무거운 생각의 느낌이니, 좀 더 광범위한 단어인 '생각'으로 수정되다.
 


 
사실 합평본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아니, 너처럼
투정 부리지 않아서
더 좋아

 
교수님께서 수업 전 원작시를 살펴보실 때, '우리의 어깨동무~' 라는 표현을 써오셨다. 
합평 때는 마음에 안 드셨는지 이내 지우시고는 '투정 부리지 않아서 더 좋아' 라고 수정하셨다.
 
그런데 난 어깨동무가 더 좋은 것 같아서, 집에 와서 마지막 연을 어떻게 쓸까 고민해보았다. 그러다 글도 늦었지만..

아니,
우리의 어깨동무는
더 질이 났는 걸.

 
그냥 교수님이 폐기하신 수정사항을 도로 주웠다. 난 이쪽이 더 좋은 거 같은데 말이지.
 
우선 '어깨동무' 라는 표현은 내 물건들이 나와 친구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하지 않아서' 라는 부정문 형식은 이미 1연에 '눈 흘기지 않아서'로 들어간 바 있다.
고로 여기서는 '질이 나다' 라는 원작시의 표현을 다시 쓰기로 한다.
 
 


 
'길들다'는 '익숙해지다' 라는 뜻이지. 
영남 지방에서는 연구개음(ㄱ,ㄲ,ㅋ)을 경구개음(ㅈ,ㅉ,ㅊ)으로 자주 바꿔서 사용하기 때문에, 장년층~노년층은 '질들다/질을 내다' 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쓴다.
 
난 '질들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 요번은 그대로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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