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학기 때 교수님 시집은 거의 읽어보았으나, 수필만은 읽지 않았다. 교수님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채로, 어떤 분인지 먼저 체험한 후에 읽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다리 건너서 알게 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성격은 이렇고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있어.' 라는 말을 듣지 않은 채로 상대의 눈을 먼저 보고 싶다. 사전 정보를 듣게 되면 아무래도 그 안경을 끼고 보게 되더라.
아무튼 이제 수업 두 학기도 들었고, 같이 밥도 두 번 먹었으니, 교수님의 자전 에세이를 읽어볼 시간이다!
수필이야 심심찮게(주로 학교 다닐 때) 읽어왔지만, 시인이 쓰는 수필은 어떨까? 궁금했다. 음, 교수님이 주로 쓰시는 형식 답게 간결한 에세이였다. A4 용지 절반만한 크기에 200페이지가 채 안된다.
연대순의 편년체 서술보다는 주제별 서술이 많아, 자그마한 에피소드를 몇 가지 실은 드라마를 읽는 느낌이었다. 감각적 심상을 불러 일으키는 묘사도 많아서, 재미있게 머릿속에 그려보며 읽었다.
1. 동반자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얻기 위해, 무엇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시와 함께, 학문도 더불어 가야 할 동반자일 뿐이다.
- p.51
요즘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으로 가지만, 교수님께서는 출판사 운영을 먼저 하시다가 진학하셨다. 그래서 시집, 수필집, 향토 문화 연구지, 논문집 등을 대학 교재보다도 먼저 보셨다.
겨울학기 중반까지만 해도 시가 썩 잘 써지지 않았다. 물론 처음 써보는 것이니 당연했으나, 나는 '이것으로 내 업을 삼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부터 했다.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가을학기 중반부터 시를 늘려 쓰기 시작했고 합평 가서 몽땅 잘렸다. 가을학기가 끝난 후 겨울학기 신청 기간 동안, 처음 뵙는 시삶문학회 회장님께서 시 얘기를 하시며 눈을 빛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2. 삶이라는 체험
모든 존재들에게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돌이나 들꽃과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말하고 싶어 하고 손짓하고 싶어 했는데,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구나.
- p. 79
교수님은 불교문예로 등단하셨는데, 처음 식사자리에서 좋아하시는 불교 경전이 있는지 여쭈었다. 특별히 경전 해석에는 매달리지 않는다고 하셔서,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에세이를 읽다가 그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교수님은 경전 해석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경험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어쩐지 생각나는 책이 두 권 있어서 가져와보았다.
옛날 신야에서 밭을 갈던 이윤(은나라의 재상)과 위수에서 낚시질하던 자아(강태공)며, 장량과 진평(한나라 개국공신) 같은 사람이나, 등우 경감(후한 광무제의 공신) 등은 모두 우주를 바로잡는 재주를 가졌지만, 그들이 평생 무슨 경전을 공부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 삼국지 [황석영, 창비] p.155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기를 마치시니, 일체 대중이 일찍이 없던 마음의 밝음과 뜻의 깨끗함을 얻어 기뻐 날뛰며, 모든 모양이 모양이 아님을 보고 불지견(佛知見)에 들어갔으나, 들어간 것도 없고 깨달은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고, 한 가지 법도 얻음이 없으매 이는 즉 열반의 즐거움이라. - 천지팔양신주경 p. 56
3. 추웠던 여고 3년
목련꽃 환한 봄날
꽃그늘에 웅크린 작은 새
방 귀퉁이에 처박힌 하늘
구들장 아래로만 흐르던 눈물
바람 자락만이 방 안을 기웃거렸다
고구마 순 무침이 맛있어요, 어머니
쓰디쓴 거짓말이 목구멍을 조여와도
슬픔은 꼭꼭 씹어 삼키기로 했다
창가에 눈부신 목련 바라
상처 어루만지던 작은 새 한 마리.
- 작은 새 / 안현심 (p.62)
교수님은 어린시절 성적이 너무나도 좋았지만, 집이 가난했던 탓에 중고등학교를 주변인들의 배려로 힘겹게 진학하셨다. 진안 출신인 교수님의 전주여고 시절은, 변변한 자취방 한 칸 얻지 못한 채 판잣집을 전전하셨다고. 가난에 향수병이 겹쳐 성적도 처지고, (아마도 졸업 이후) 집 방구석에 처박혀 우울에 시달리던 심정을 시로 쓰셨다.
힘겨웠던 시절이라는 밑바닥에서 가장 진솔한 시가 나온다. 과거는 시인에게 무한한 보고가 되겠지만, 한 사람이 안고 살기에는 버거운 창고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가 없이「작은 새」같은 울림 있는 시가 나오지 못할테고. 시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4. 우리글 사랑이 곧 나라 사랑
우리는 우리글을 너무 쉽게 생각하여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문인이나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분들은 더욱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 p. 81
나도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많이 보는 인쇄물은 꼼꼼히 검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KBS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 만든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 교수님은 출판사 운영하실 때 원고 교정을 수없이 하셔서 그런지, 합평 때 맞춤법을 굉장히 잘 가르쳐주신다. 특히 띄어쓰기를 많이 배웠고, 한자어보다 순우리말에 주목하는 것도 배웠다.
나는 제2외국어 어학연수를 한 학기 다녀온 적이 있다. 반년 동안 외국어로 읽고 글쓰고 말했더니 한국 와서 한글로 긴 글을 못 썼다. 그 때부터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이 들었고, 시를 쓸 때도 쓸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유의어 탐색 용도로도 잘 쓰고 있다. (국어사전 활용을 생활화합시다!)
5. 시를 잘 쓰는 사람
대학교수보다는 초등학교 선생이 시를 잘 쓰고,
사장보다는 노동자가 잘 쓰고,
자가용이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잘 쓴다는 말을 새겨왔다.
- p. 84
대전에 시 수업 들으러 조금 일찍 도착한 날에, 대전문학관에 방문한 적이 있다. (사진 관리를 잘못해서 찍어온 사진을 몽땅 날려먹었다. 끄응...) 2층에 올라가니 대전의 대표 문인 5분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있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한 분 빼고 모두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교수님은 운전면허 취득 후 15년이 넘도록 자가용이 없으셨다고 한다. 아마 당신께서 새겨두신 말씀 탓이 아닐까. 그래서 기차, 버스, 전철 타고 멀리서 오는 나를 늘 안쓰러워 하시고 챙겨주신다.
관람하면서 시구와 그림이 담긴 엽서를 무료로 가져갈 수 있다. 나는 교수님께 여러 개 받았는데, 문학관 갔다가 다른 시인분들 엽서도 더 가져왔다ㅎㅎ
6. 시 쓰기
시 쓰기는 나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응어리를 '시'라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고통의 강을 건널 수 있었다.
p. 150
나도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싶어서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쓰다보니 가르쳐줄 사람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그렇게 시 창작 수업을 만나게 되었다.
예전엔 슬프면 그냥 엎어져 울었는데 요즘은 연필을 든다. 마냥 엎어져 우는 것보다는 시를 쓰면서 감정을 풀어내니 더 좋다. 누군가 볼 수도,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나니 감정이 형체를 입은 것 같기도 하고, 몸으로만 견디던 것보다는 가벼워진 느낌이다. 전에는 너무 많이 울면 머리가 아팠는데, 요즘은 괜찮다.
나는 감각과 감정이 예민해서, 남들에겐 별 거 아닌 일에도 잘 상처받고 운다. 속좁고 대담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단점처럼 여겼다. 그런데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예민한만큼 순간의 감정을 잘 잡아낼 수 있다면, 더 좋은 시가 많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시인이 된다면! 그걸 장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힘겨운 시절을 담아낸 수필인데도, 시인의 아름다운 표현이 함께 짜여있어 어둡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읽고 나니 어쩐지 공감이 되어 많이 울었다.
한 사람을 아는 것은 참 흥미롭고도 신기한 일이지. 무슨 신박한 모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이 살아 숨쉬는 저 사람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하는 묘한 궁금증에 대한 답을 주니까, 그렇게 느껴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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